
29일 방송되는 KBS 1TV '한국인의 밥상'은 "울릉도의 봄, 밥상에 피어나다" 편으로 꾸며진다.
동해 바다 한가운데 솟아있는 섬 울릉도. 울릉도에도 봄이 찾아왔다. 겨울이 길어서 더욱 반가운 봄.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울릉도는 산과 들, 청정바다에서 새로운 먹을거리들을 쏟아낸다. 1880년대, 주민 이주정책을 통해 울릉도로 터를 옮겨온 이들은 그로부터 140여 년 동안 오로지 산자락과 청정 바다에 기대어 살아왔다. 산자락을 개간해 논과 밭을 일구고,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으며 억척스럽게 삶을 개척해 온 울릉도 사람들. 그들의 강인한 삶이 눈부신 봄을 맞아 밥상에서 피어난다.
겨울 추위를 뚫고 올라온 봄나물 천국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리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부터. 아직도 남아있는 여러 개의 돌무덤들이 그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다. 본격적으로 주민 이주가 시작된 것은 1882년부터. 이때 최초의 정착지가 바로 태하리이다. 오랜 세월 척박한 산자락에 기대어 화전을 일구며 삶을 개척해온 태하리 사람들의 삶은 겨울 추위를 뚫고 올라온 산나물의 강인함을 닮아있다. 이른 봄, 태하리의 아낙들이 모노레일을 타고 산으로 향한다. 어느새 명이나물, 부지깽이나물, 전호나물이 잔설을 뚫고 싹을 틔웠다. 뒤이어 나올 미역취나물에 고비나물, 삼나물까지... 대여섯 가지의 나물을 동시에 채취해야 하는 봄은 아낙들에게 일년 중 몸이 가장 고달픈 계절이다. 까딱 발을 헛디디면 굴러떨어질수도 있는 경사가 심한 산비탈에 매달려 하루 10시간씩 나물을 뜯어온 세월이 수십 년. 하지만 아낙들에게는 여전히 봄이 가장 설레는 계절이다. 산나물은 그녀들에게 생활이자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차려내는 봄 밥상은 봄나물의 천국. 명이나물을 살짝 데친 뒤 가볍게 간을 해 첫 번째로 상에 올린다. 명이나물은 먹을 게 귀했던 울릉도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이어준 고마운 나물이기 때문이다. 독특한 향과 부드러운 맛을 자랑하는 부지깽이나물은 참기름으로 간을 해 밥을 짓는다. 쌀 한 톨을 얻기 위해 바닥에 일일이 돌을 깔고 황토를 부어가며 논을 만들었던 태하리 사람들이 한줌 쌀에 부지깽이나물을 잔뜩 넣어 허기를 달래던 밥이다. 봄이 되면 울릉도 앞바다로 찾아와 춘궁기를 달래주던 꽁치는 궁합 좋은 물 엉겅퀴와 함께 국으로 끓여 내는데, 아낙들은 험한 산자락을 타고 다니며 자연산 물엉겅퀴를 채취해 무겁게 지고 다니던 시절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울릉도의 화산재 토양에서 자라 부드러운 더덕과 한약 성분이 있는 전호나물을 함께 부쳐내는 보약 같은 전까지 완성되면, 아낙들은 울릉도만한 보물섬도 없다 싶어 고단함이 녹는다. 태하리 사람들의 강인한 삶이 녹아있는 봄 밥상을 만나본다.
울릉도 마지막 해녀의 봄 해산물 한 상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울릉도의 동남쪽에는 섬의 중심 마을인 도동이 있다. 울릉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도동항이 있는 곳이다. 50년 이상 물질을 해온 베테랑 해녀 김수자(78세) 씨는 이 도동항 앞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가고 있다. 17살에 제주도에서 물질을 시작해 23살에 울릉도로 온 김수자 씨는 울릉도에 남은 해녀 8명 가운데 아직도 물질을 하는 단 두 명의 해녀 중 한 명이다. 다른 해녀들이 고령화로 물질을 차례로 포기한 상황,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도 바다에 들어가면 오히려 힘이 난다는 김수자 씨가 2025년 첫 물질에 나섰다. 5월까지도 물이 차다는 울릉도의 바다에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김수자 해녀. 혼자 물속에 들어간 그녀가 걱정돼 동행한 남편 이병술(79세) 씨와 선배 해녀 박순열(85세) 씨는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선배 언니와 남편의 등쌀에 평소보다 짧은 물질을 했지만 수확량이 적지 않다. 울릉도 봄 바다에서 나는 뿔소라와 울릉도와 독도 앞바다에서만 자라는 대황이 한가득이다. 껍데기를 깨서 내장을 제거해야 쓴맛이 없는 싱싱한 뿔소라로 만드는 것은 제주도식으로 된장으로 간을 한 물회. 어린 나이에 고향 제주도를 떠나 울릉도로 물질을 하러 왔던 김수자 해녀와 박순열 해녀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타향살이의 설움, 몸이 부서져라 물질을 해서 자식을 공부시키며 울릉도에 뿌린 내린 한평생의 삶이 녹아있는 음식이다. 바닷가 사람들에게는 명이나물 못지않게 귀한 바다 나물인 대황으로는 밥을 짓는다. 배고프던 시절, 대황에 감자만 넣어 밥을 지어 먹으면서도 독도 앞바다까지 나가 물질을 하곤 했단다. 그 자부심에 울릉도 해녀의 맥이 끊기는 게 걱정인 김수자 해녀는 90세까지 물질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바다에서 행복을 일궈온 울릉도 해녀들의 바다 내음 가득한 봄 밥상을 만나본다.
자식들을 위해 차려낸 어머니의 풍성한 봄 밥상 – 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나리
해발 450m 고지에 위치한 울릉도의 유일한 평지 나리분지. 해발 700m 전후의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이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눈이 많이 내리고 겨울이 긴 곳이다. 눈이 쌓인 풍경은 겨울이지만, 고로쇠나무는 수액을 내뿜으며 자연의 법칙대로 봄이 왔음을 알린다.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기 전인 20여 년 전만 해도 울릉도 안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였던 나리분지는 고로쇠 수액 덕에 최근 들어 인구까지 늘어났다고. 오늘은 한 달 남짓 동안만 가능한 고로쇠 수액 채취 작업을 위해 한귀숙(71세) 씨의 가족이 총동원됐다.
작업이 끝나자 한귀숙 씨는 자식들을 키울 때 해주곤 했던 추억의 음식들로 가족이 함께 먹을 밥상을 준비한다. 고로쇠 수액으로 담근 된장에 오징어의 간인 누런 창을 넣어 자작하게 강된장을 끓인다. 울릉도에 오징어가 지천이던 시절에도 나리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던 오징어. 오징어를 건조하는 과정에서 제거한 내장이 이들에게는 식재료였다. 가을에 오징어 누런 창을 소금에 절여 젓갈처럼 삭혀가며 이듬해 봄까지 먹었단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린다는 퀴퀴한 냄새에도, 오징어 누런 창은 울릉도 사람들의 힘겨웠던 삶과 함께 해온 소울푸드이다.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토종 홍감자의 명맥을 잇기 위해 직접 농사지었다는 홍감자. 나리분지 사람들에게 그만큼 홍감자가 특별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곡물을 재배하기 힘든 나리분지에서 쌀과 밀가루를 대신해 온 것이 바로 홍감자. 한귀자 씨는 홍감자를 삶아 으깨 녹말가루를 섞고, 반죽해서 가래떡인 골미를 빚는다. 50여 년 전, 여러 개의 산을 넘어 나리분지로 시집을 온 이래 한귀숙 씨에게는 자식들에게 세끼 밥을 먹이는 것이 삶의 목표이자 사명이고 성취였다. 홍감자로 빚은 골미(가래떡)를 일일이 칼로 잘라내 정성스럽게 끓여 내는 골미죽. 없는 재료로 더 맛난 음식을 차려 자식들 입에 넣어주고자 했던 어머니의 사랑이 고스란히 담긴 음식이다. 홍감자와 옥수수를 섞어 지은 밥까지 놓인 봄 밥상은 어머니의 정성이 마술을 부린 듯 따뜻하고 푸짐하다.
봄의 황금 어장에서 건져 올린 밥상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리
울릉도의 가장 큰 항구이자 동해안의 어업기지로 통하는 저동항. 이곳에 30여 년 전 울릉도와 독도를 오가던 유람선을 운항하면서 울릉도에 정착한 뒤, 10여 년 전부터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권인철(61세) 선장이 있다. 울릉도 앞바다는 20~30m만 나가도 먼바다 못지않게 수심이 깊어지기 때문에, 섬 인근 바다가 모두 그물을 놓는 자리다. 바닷속에는 암초가 많고 지형의 높낮이가 커서 다양한 물고기들이 서식하는 황금 어장이다. 드디어 그물을 올리자, 줄줄이 걸려 올라오는 참가오리들. 국립수산과학원의 검사 결과 흑산도 홍어와 유전자가 같은 것으로 밝혀진 물고기다. 통발을 걷자, 제주도에서 주로 나던 자리돔과 홍해삼이 올라온다. 지구 온난화로 울릉도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들에도 많은 변화가 있다.
울릉도 토박이 선장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자리. 권 선장은 홍해삼을 내장을 제거하고 살짝 데쳐낸 뒤, 초고추장이 아닌 참기름과 간장으로 무쳐 낸다. 울릉도식 해삼 회무침에 울릉도 사람 다 됐다고 농담하는 토박이 선장들. 지난 100여 년 동안 오징어로 삶의 원동력을 삼았던 울릉도 사람들은 지난 2000년대 중반부터 오징어 어획량이 급격히 줄면서 위기를 맞았다. 인구도 3만여 명에서 만 명 이하로 떨어졌다. 그런 어려운 시기에 오히려 울릉도에 정착해 준 권인철 선장이 고마운 토박이 선장들. 권 선장은 10여 년 간의 어부 생활로 터득한 솜씨를 발휘해 먹음직스럽게 문어숙회와 참가오리회를 썰어내는데, 오징어를 대체할 울릉도의 새로운 맛을 찾을 수 있을지가 숙제다. 공기도, 물도, 인심도 좋아 울릉도에 뼈를 묻을 생각이라는 권 선장과 토박이 선장들이 함께하는 울릉도의 봄 바다 밥상을 만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