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건뉴스=최유리 기자]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나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가진 아동이 플라스틱 제품에 흔히 포함된 비스페놀A(BPA)와 같은 내분비계 교란물질에 더 취약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해당 아동들은 일반 아동에 비해 BPA를 체외로 배출하는 해독 능력이 떨어져, 체내에 더 오래 잔류하게 되며 이로 인해 신경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는 미국 로완 버추아 골격의과대학(Rowann-Virtua School of Osteopathic Medicine)의 T. 피터 스타인 박사 연구팀이 국제 학술지 ‘플로스원(PLOS ONE)’에 발표한 것으로, ASD 및 ADHD를 앓는 아동들이 일반 아동보다 BPA를 배출하는 능력이 각각 11%, 17%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소변 내 글루쿠로니데이션(glucuronidation) 수치를 분석해 BPA 해독 효율을 평가했으며, 이는 간에서 당 분자를 붙여 독성 물질을 수용성으로 만들어 배출하는 대사 경로다.
이번 연구에서는 BPA뿐 아니라 프탈레이트 계열의 DEHP 역시 유사한 해독 저하 경향이 확인됐으나, 통계적으로는 유의미하지 않았다. 특히 연구진은 전체 12개의 해독 경로 중 BPA와 DEHP만에서 이런 차이를 확인했으며, 이는 ASD와 ADHD 아동이 특정 환경 독성물질에 생물학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BPA와 DEHP는 대표적인 내분비계 교란물질로, 호르몬 시스템을 방해해 성장과 발달, 특히 신경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러한 화학물질에 대한 해독이 지연될 경우, 특히 뇌가 활발히 발달하는 아동기에는 그 영향이 더욱 치명적일 수 있다. 연구팀은 “이번 결과는 BPA의 배출 효율 저하가 ASD 및 ADHD와 같은 신경발달장애와 연관돼 있다는 최초의 생화학적 증거”라며, 유전적 요인뿐 아니라 환경적 취약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SD는 사회적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의 어려움, 반복적 행동 등을 특징으로 하며, 감각 자극에 과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반면 ADHD는 지속적인 부주의, 과잉행동, 충동성으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질환이다. 두 장애는 각각 독립적인 진단 기준을 갖고 있지만 종종 함께 나타나며, 실행 기능과 감정 조절에서 유사한 어려움을 보이기도 한다.
해당 연구는 대사체 분석을 통해 ASD 및 ADHD 아동의 BPA 관련 대사 경로에 특이한 패턴이 존재함을 밝혔으며, 일반 아동에서는 이러한 패턴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단순한 노출 문제가 아니라 체내 처리 능력의 문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미 여러 역학 연구에서는 대기오염, 살충제, 난연제 등 환경오염물질과 신경발달장애 간의 연관성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특히 임신기와 영유아기의 화학물질 노출은 아동기 신경계 발달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시기적 민감성에 주목해왔다.
하지만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유럽 식품안전청(EFSA)은 BPA의 안전성에 대해 여러 차례 검토했음에도, 여전히 많은 소비 제품에서 BPA가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연구는 현재의 노출 기준이 일반 아동에게는 안전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발달장애를 가진 아동에게는 충분히 보호되지 않을 수 있음을 경고한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BPA와 프탈레이트계 화학물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제품 제조 시 대체물질 사용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개인 차원에서는 유리나 스테인리스 소재의 식기류 사용, 통조림보다 신선한 식재료 선택, 영수증과 같은 열전사 종이 피하기 등이 일상 속 실천 가능한 해법이 될 수 있다.
또한 정부는 임신부와 영유아를 포함한 민감군에 대한 환경독성물질 노출 저감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하며, 유전적 및 후생유전학적(에피제네틱) 연구를 통해 고위험군을 조기 식별하고 맞춤형 예방 조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ASD와 ADHD 아동은 신경발달상의 특성과 더불어, 환경 독성물질을 처리하는 능력에서도 취약함을 지닌 ‘이중의 위험군’이다. 이번 연구는 질병 원인을 단정짓지는 않지만, 조기 진단이나 치료와 별개로 ‘화학물질에 대한 노출 자체’가 중요한 고려 대상이 돼야 한다는 점을 정책 입안자와 부모에게 분명히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