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국제뉴스) 이병훈 기자 = 임차인이 집을 비우는 순간, 그동안 쌓아온 대항력의 성(城)이 무너진다. 이후 아무리 임차권등기를 해도 소용없다는 게 전문가의 설명이다.
최근 부동산 전문 엄정숙 변호사(법도종합법률사무소)는 지난 4월 15일의 대법원 판결인, 임차인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집을 비운 후 임차권등기를 마쳐도 경매 매수인에게 보증금을 청구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다(2025. 4. 15. 선고 2024다326398 판결)라는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다.
사건은 이랬다. 임차인 A씨는 주택을 빌리면서 전입신고와 입주를 마쳐 대항력을 얻었다. 당시만 해도 A씨는 이후 설정된 근저당권보다 앞선 선순위였다. 그러나 계약이 끝나도 집주인이 보증금을 주지 않자 A씨는 보증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했고, 채권을 보험사에 넘겼다. 문제는 A씨가 이미 이사를 간 뒤 보험사가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했다는 점이다. 이후 경매가 진행됐고 B씨가 집을 낙찰받았다.
실무에선 종종 있는 일이라고 엄 변호사는 말한다. 보증금을 못 받으니 일단 이사부터 가고, 그리고 임차권등기를 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바로 그 순서가 치명적이라고 본 것이다.
대법원은 주택의 인도와 주민등록이라는 대항요건은 대항력 취득 시에만 갖추면 충분한 것이 아니라 대항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계속 존속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임차인이 일단 대항력을 얻었어도 주택 점유를 잃으면 그 순간 대항력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재판부는 대항력이 상실된 이후 임차권등기가 마쳐져도 소멸했던 대항력이 당초에 소급해 회복되는 게 아니라 등기가 마쳐진 때부터 그와는 동일성이 없는 새로운 대항력이 발생한다고 못 박았다.
결국 순위가 뒤바뀌는 것이라고 엄 변호사는 강조한다. 처음엔 근저당권보다 앞섰는데, 이사 가고 나서 등기하면 근저당권보다 뒤처진다. 경매에서 선순위 근저당권이 소멸하면 후순위인 임차권도 함께 날아가버린다는 게 이번 판결의 핵심이다.
그는 경매 매수인은 주택임대차보호법상 임차주택의 양수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판례라며, 후순위로 밀린 임차인은 매수인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원심 재판부는 임차권등기 후에도 대항력이 유지된다고 봤다. 그러나 대법원은 법리를 오해했다며 사건을 되돌려 보냈다. A씨는 결국 보증금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 판결은 새로운 법리를 만든 게 아니라고 엄 변호사는 강조한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의 기본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다. 대항력을 유지하려면 점유와 전입신고라는 요건을 계속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엄 변호사는 법은 형식을 중시한다고 말한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전입신고와 점유를 요구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등기된 물권에 버금가는 강력한 대항력을 주는 만큼, 그 요건도 엄격하게 유지돼야 한다는 게 원래 법의 취지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임차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순서가 중요하다고 엄 변호사는 말한다. 첫째, 보증금을 못 받더라도 집에 계속 살면서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해야 한다. 둘째, 등기부등본을 떼어 임차권등기가 실제로 경료됐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셋째, 그 확인이 끝난 후에야 이사를 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법원에 임차권등기를 신청했으니 괜찮겠지 하고 먼저 이사를 간다고 그는 지적한다. 하지만 세입자가 임차권등기를 신청하더라도 실제로 등기가 마쳐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에 점유를 잃으면 대항력도 함께 잃는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엄정숙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결국 기본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라고 말을 맺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요구하는 대항요건의 효력을 제대로 유지하려면 점유를 잃어선 안 된다는 원칙이다. 하루 이틀 차이로, 순서 하나 잘못 밟아서 보증금을 날릴 수 있다. 기본을 지키는 게 최선의 방어라는 게 그의 조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