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피해자 눈물 못 닦아준 페퍼저축은행 피싱 판결

[ 더리브스 ] / 기사승인 : 2025-09-02 09:39:15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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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황민우 기자]
[그래픽=황민우 기자]




페퍼저축은행 관련 보이스피싱 대법원 판결이 피해자 눈물을 닦아주긴커녕 피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법원이 비대면 금융거래에서 신분증 사본으로도 인증 절차가 통과되는 걸 인정하는 판단을 내리면서다.



이번 판결은 피싱 관련 첫 판례가 된 만큼 파장이 예상된다. 실물 신분증이 아닌 신분증 사본으로 보안이 통과되면서 피해자들은 피싱 피해임에도 이를 문제 삼기 어렵게 된 반면, 금융기관은 보안기술 관련 책임을 법원으로부터 사실상 면제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지?





신분증 사본이 악용된 금융사고가 발생해 진행된 소송에서 피고인 페퍼저축은행이 지난달 14일 승소했다. 대법원이 페퍼저축은행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며 법리상 문제가 없다고 봐서다.



판결 내용에 따르면 피해자 A씨는 지난 2022년 7월 13일에 자신의 딸을 사칭하며 접근한 범죄자에게 본인 운전면허증 사진을 포함한 개인정보를 보냈다. 같은 날 범죄자는 이를 악용해 A씨 명의로 공동인증서를 발급받고 페퍼저축은행에서 비대면으로 A씨 명의 계좌를 개설한 뒤 9000만원을 대출받았다.



이 사건이 단순한 보이스피싱 사례가 아닌 건 범죄자가 A씨 본인의 신분증 사본만으로도 페퍼저축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하고 대출을 받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안전한 금융거래를 보장해야 할 은행에서 신분증 인증 시스템이 허술해 발생한 피해임에도 대법원은 페퍼저축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신분증 인증을 꼭 원본으로 할 필요가 없다고 봤다. 행정안전부에서 진행하는 신분증 진위확인은 단순 광학문자인식(OCR) 수준에 불과하니 최종적으로 제출되는 촬영본은 원본이든 사본이든 매한가지라는 이유에서다. 이에 따라 법원은 “피고 은행이 거래 당시에 실명확인증표 원본을 바로 촬영한 파일을 제출받는 것과 사전에 촬영된 파일을 제출받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언급했다.



또한 법원은 페퍼저축은행이 복수의 인증수단 절차를 거친 점을 판결 근거로 들었다. 신분증 인증이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추가로 신용정보 조회를 비롯한 계좌‧휴대전화‧공동인증서 인증 등 독립 인증수단 절차가 있기에 피고가 대출명의자를 확인하는 노력을 다했다고 법원은 판단했다.





판결문 허점 지적한 시민사회






페퍼저축은행. [그래픽=황민우 기자]
페퍼저축은행. [그래픽=황민우 기자]




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결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엄연한 금융거래에서 굳이 원본 인증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본 건 금융 안전을 후퇴시키는 격이라는 이유에서다.



경제정의실천연합과 신분증 사본 인증 피해자모임 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을 열고 해당 판결문에 대해 전면 비판했다. 먼저 본인확인절차에서 신분증 인증을 하는 목적은 실물 소유로써 당사자 확인을 하는 절차인데 단순한 정보 조회로 법원이 착각을 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경실련 경제정책팀 겸 경제정의연구소 정호철 부장은 “대면 거래 시 신분증을 직접 제출함으로써 현장에 본인이 존재함을 증명하듯 비대면도 (같은 차원에서) 실물 신분증에 대한 소재를 확인하는 건데 대법원이 신원확인을 간과했다”며 “원본과 사본이 차이가 없다고 하는 건 전자금융거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실관계를 모르고 판단했다고밖에 보여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복수의 인증 수단이 독립성이 있다는 법원의 판단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사실상 연계정보라 신분증 하나로 다 풀리는 건 매한가지라는 점에서다. 신분증 사본 인증 피해자모임 공대위 박정경 대표는 “대법원에서 (복수의 인중 수단이) 독립성이 있다고 착각하는 게 신분증 인증 외 나머지 이중인증절차들은 신분증 사본을 제출하면 비밀번호 변경이 가능해 다 뚫리는 상황이다”라고 언급했다.



이에 하루빨리 금융 보안이 강화되길 바라는 의견도 나왔다. 신분증 사본이 도용되며 2억원 피해를 본 피해자 모임 회원 B씨는 더리브스와 대화에서 “금융권에서 이걸(본인확인절차를) 한 단계라도 높이면 되는데 문턱이라도 조금 높여놓으면 범인들이 이렇게 쉽게는 안 한다”며 “(허술한 인증 시스템을 개선하고자) 은행을 상대로 소송하는 건 저희가 유일할 텐데 이번 대법원 판결은 5년간 걸쳐서 자료를 모은 노력을 수포로 돌리는 거다”라고 호소했다.





첫 판례인데…금융권 면죄부 준 셈





이번 판결을 시민사회 및 전문가들이 심각하게 보는 건 해당 내용이 금융권 신분증 인증 절차 관련 보안 문제를 다룬 첫 판례이기 때문이다. 판례는 실제 법은 아니지만 유사한 사법 판단의 기준이 된다. 대법원에서 신분증 사본의 사본을 쓰더라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을 하면 하급심 법원들은 현실적으로 대법원의 해석 논리를 따라갈 가능성이 높다. 즉 이러한 판결이 판례가 된 건 앞으로의 재판들에서 다른 피해자들 역시 승소할 가능성이 더 희박해졌다는 의미다.



이는 보안이 부실했던 금융회사에 면죄부를 주는 격이도 하다. 비대면 거래까지도 안전을 보장하는 책임이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금융회사에게 있음에도 이에 대한 잘못을 묻지 않게 된 결과 신분증 인증 시스템을 고도화하기 위한 노력은 약화될 수 있다.



신분증 진위를 확인하는 정교한 기술이 시장에 이미 개발돼 있음에도 금융회사들이 적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건 비용 부담 때문이다. 그렇기에 금융사들이 시스템을 갖추도록 유인책을 내놔도 모자랄 판에 대법원은 굳이 인증 시스템을 고도화할 의무가 없다고 판결로서 보장하게 된 셈이다. 신분증 사본을 악용한 범죄가 보다 횡행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법무법인 우면 이희용 변호사는 더리브스와 통화에서 “앞으로 은행들은 이번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제시하며 법원이 인정해주고 있지 않냐고 나올 수 있는 사례가 될 거다”라며 “법리적으로야 대법원이 뛰어나겠지만 현실적인 부분들까지도 고려가 됐을지는 의문”이라고 짚었다.



고려대학교 김기창 법학과 교수는 더리브스 질의에 “이렇게 판결하면 피해자만 당하고 마는 게 아니라 대부업체 등에서 안전한 솔루션을 찾아보려고 노력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버린다”며 “수십억 들여 솔루션을 마련하는 것보다는 몇천만원에 변호사를 고용해 재판하면 승소하니까 변호사 비용까지도 받아내게 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행정 규제자는 신분증 원본을 찍어 본인 확인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금융회사에서는 (행정) 규제자가 하라는 것조차 안 했는데도 대법원에서 금융회사 편을 들어준 괴상망측한 판결”이라며 “시장에는 훨씬 나은 솔루션을 개발해 이미 가지고 있으나 (이번 판결이) 금융회사들로 이를 구입해 채택하게 하는 인센티브를 없애버렸다”고도 덧붙였다.



한편 페퍼저축은행 관계자는 더리브스와 통화에서 “앞으로도 규정‧법에 따라서 절차를 (진행)하겠다”며 “인증 시스템 고도화는 계속할 거다”라고 말했다.



양하영 기자 hyy@tleav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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