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적감정전문가 이희일박사(문자조형전공)
-한국법과학연구원장
-글벌사이버대학교 대학원 경찰과학수사학과 특임교수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미국법학과 겸임교수
최근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남긴 방명록 한 줄이 화제가 되었다.
회담 전 서명식에서 공개된 대통령의 글씨는 단정하면서도 힘이 있었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아주 아름답게 쓰셨다.”라며 즉석에서 찬사를 보냈다.
나아가 대통령이 사용한 펜에까지 관심을 보이며 대화가 이어졌고, 경직될 수 있었던 외교무대가 한순간에 부드러워졌다.
글씨 하나가 국가 간 정상회담의 분위기를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우리는 흔히 글씨를 단순한 기록의 도구로 여긴다.
하지만 글씨는 단순한 문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필적은 개인의 성격, 심리, 가치관이 담기는 ‘인격의 흔적’이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에서 인재를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가 바로 글씨, 즉 ‘서(書)’였다. 이른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기준 속에서 글씨체는 한 사람의 됨됨이와 태도를 가늠하는 지표였다. 오늘날에도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필적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첫째, 신뢰의 상징이다. 계약서, 확인서, 진술서 등에 쓰이는 손글씨 서명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책임과 약속을 담는다.
둘째, 성향과 심리를 읽는 창이 된다. 필적학에서는 필체의 필압, 자간, 행간, 획의 방향 등을 분석해 필자 고유의 습관과 심리적 특성을 파악한다.
특히 지도자의 필적은 국가적 상징성을 지닌다. 공식 문서나 외교 무대에서 남긴 글씨는 후대에까지 기록으로 남아 역사의 평가 대상이 된다.
이번 이재명 대통령의 방명록이 외교 현장에서 신뢰와 존중을 이끌어낸 것은, 필적이 단순히 미적 요소를 넘어 리더십과 책임감을 드러내는 도구임을 보여준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손글씨의 가치를 점점 잊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 서명과 전자 문서가 보편화되면서, 손글씨는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손글씨의 진정성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수많은 전자적 서명 속에서 직접 쓴 한 줄의 글씨는 더 큰 무게를 지닌다. 그것은 복제될 수 없는 고유한 흔적이자, 인간적인 신뢰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필적은 단순한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인격과 신뢰, 역사적 책임을 담는 상징적 행위다.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오래된 격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대통령의 필체가 보여준 것처럼, 한 사람의 글씨는 때로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와 국가의 신뢰를 이끌어낼 수 있다. 작은 한 획 속에 담긴 진정성이, 거대한 담론과 협상을 움직이는 힘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