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산 박대성과 한국회화의 위대한 산맥

[ 대구일보 ] / 기사승인 : 2024-02-18 14:18:26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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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학강컬렉션 대표/화가
한국전쟁 소용돌이에 현재 경북 청도의 운문댐 옆 공암리 골짜기에서 아버지는 죽임을 당하고 다섯살 어린아이가 왼팔을 잃었다. 이때 하늘은 아기에게 왼팔을 대신하여 천부적인 집념과 인내 그리고 만물을 살피는 안목을 가지게 하였을 것이다. 장차 아이는 세상을 놀라게 하리라는 천지신명의 예언과 숙명을 계시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서두를 꺼낸 것은 바로 소산 박대성(1945~)화백의 절절한 대하드라마 같은 인생 스토리 때문이다. 어린시절 한쪽팔로 갱지에 이것 저것 그렸다. 양부모 없는 어린이는 청도 냇가에 눈물을 적시며 돌 위에 나뭇가지로 마음을 그렸다. 초등학교 졸업 후 몇년이 지나 청소년기에 부산으로 갔다. 노당 서정묵화실에서 붓사용법을 익혔지만 거의 독학에 가까웠다. 약관(20세)에 동아민전에 입선을 시작으로 국전에 수차례 입선하였다.

대구로 왔다. 중앙로에 화실을 차렸다. 여러사람들과 교류하며 수묵풍경을 발표했다. 젊은 청춘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대만으로 갔다. 외국에 나가기 어려운 시절 모험을 감행했다. 재능을 본 주위의 배려가 있었다. 고궁박물관에서 명·청대 그림을 임모하며 동양화의 기법과 정신을 연구하였다. 대만 공작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소식이 대구에 알려졌다.

75년 대구 모 일간지가 중앙로에 화랑을 만들었다.지역의 유명한 원로화가로 오픈전을 계획했으나 문화부 젊은 기자들은 청년작가 박대성개인전을 추진하였다. 개인전은 성공이었다.

하지만 지방작가로 젊은 삶을 이어가기에는 본인이 용납하지 않았다. 주거지를 서울근교로 옮겼다. 중앙화단에 도전이었다. 박노수 등 선배화가를 찾아 수묵정신을 다졌다. 결국 79중앙미술대전에 대상을 수상하며 소산 실경산수를 전국에 알렸다. 80년초 최초의 가나갤러리 전속작가로 성장하며 이건희 회장의 도움으로 중국과 수교전인 88년에 베이징에 가서 리커란을 만났다. 이때 서법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호암갤러리에서 대작전을 펼치며 자신과의 도전이 계속되었다. 꿈속에서도 붓을 잡고 운필하였다.

이로써 소산대관산수를 선보였다. 평창동에 거주한 시기에 매일 지인들이 찾아와 일상이 복잡해졌다. 94년 뉴욕의 소호에서 일년을 보내며 현대미술판을 익혔다. '모든것이 나로 부터 시작하며 만물을 조용히 살펴 이치를 깨닫는다' 는 정관자득,한 진리를 깨달았다.

고향 인근 경주로 왔다. 눈오는 불국사,석굴암,남산 등 우리 것을 찾았다. 독수리가 공중에서 내려다본 부감법과 동해의 고기가 어안으로 본 금강산을 그렸다. 독특한 원근과 구도가 탄생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경주솔거미술관 내 박대성관이 건립되어 매년 기획전을 연다. 전국에서 관람객이 넘쳐나며 독보적 수묵화의 거장으로 올랐다. 지금도 고향의 청도 공암리에 양철판을 덧댄 수수한 작업실에서 한지의 대작에 소나무와 바위를 그린다. 아호인 소산으로 시작하여 거대한 산맥의 박대성이 되었다.

2022년 봄부터 세계 순회전을 개최하고 있다. 베를린을 시작으로 카자흐스탄,로마,LA카운티미술관,하버드대학교 센터,다트머스대학미술관,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메리워싱턴대학교까지 현재 진행 중이다. 지금은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소산비경' 박대성 해외순회 기념전을 3월 24일까지 열고 있다. 오픈날 필자도 참석하여 축하를 드렸다. 대구경북도 세계적 수묵화가를 배출한 자랑스러운 예술도시 이다.

최미화 기자 cklala@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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