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시대에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우리의 역사와 문명의 줄기를 ‘불함문화’로 그 민족원류를 모색했던 육당 최남선(1890~1957)의 역사관은 광복 후 소리 소문도 없이 친일 논쟁에 휘말리면서 단절되었다.
불함문화론의 불함(不咸)을 ‘부루칸’으로 해석하면서 만주 퉁구스지역 여진과의 문화적 원류를 이어내려는 시도였다. 그 후 불함문화론은 주류 학단의 랑케 실증주의 사관을 빌미로 하여 완전 폐기처분 되어버렸다.
전통 노래를 통한 민족 연원을 찾아내기 위해 민요 연구의 깃발을 처음으로 든 분이 바로 이재욱(1905~1950)이다. 대구 서성정 103번지(현 서성로 1가 13번지)에 대구의 갑부 이병학의 손자로 태어났다. 시인 이장희의 조카였던 이재욱은 민요의 현장조사를 통해 민족의 원류를 밝혀내려고 노력했던 뛰어난 학자였다.
육당 최남선은 ‘산유화’가 북방의 여진 계열인 예족에서 유래된 노래로, 백제 유민을 통해 전해진 옛 노래 가락이라고 하였다. 대구고보와 경성제대를 나온 이재욱은 당시 조윤제(영양), 김사엽(영천), 김성칠(영천) 등과 함께 우리 국문학 연구의 기초토대를 구축한 대표적인 1세대 학자이다.
이재욱은 초대 국립도서관장을 지내다가 대구로 내려와 영남민요 조사와 함께 ‘영남전래민요집’이라는 필사본 책을 남겼다. 이재욱은 당시 유전해 오던 ‘산유화가’라는 민요 가사를 처음으로 채록한 기록을 남겼다. 이 ‘산유화가’는 불교문화가 확장되기 이전에 샤마니즘적 양상을 띤 노래로 파악하고 이 노래를 통해 민족적 유래를 캐내려고 노력하였다. 복숭아나 버드나무를 신목으로 삼는 북방민족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삼신과 성황당의 토속 신앙과 결합한 산유화는 민요시학으로서 오래된 역사 속의 꽃나무로 이해할 수 있다. 안동에 유전하는 ‘성주풀이’ 또한 그 유래와 역사가 심원하다.
동국여지승람 선산 조에 나오는 ‘어리매연(魚里埋淵)’이 속칭 여진이라는 촌락 인근 오태소가 향랑이 뛰어들어 죽은 현장임을 확인하였다. 향랑이 ‘산유화가’의 노래를 부르며 빠져죽은 설화의 현장은 백제에서 밀려난 여진인들의 마을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그 마을에 살던 박자신의 딸 향랑이 계모의 학대와 계모가 불륜으로 맺은 성주군수의 아들인 최경남에게 강제로 시집을 보내자 향랑은 ‘산유화가’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오태못에 빠져죽었다. 그 후 향랑의 억울한 죽음의 이야기가 설화화하면서 발생된 ‘산유화가’와 ‘메나리꽃노래’는 실의와 슬픔을 뛰어넘어선 희망의 꽃노래로 변주되어 전국으로 펴져나갔다.
‘"산유화가’의 변형인 ‘메나리꽃노래’도 경북 구미, 상주, 성주, 고령 일대에 퍼져 있다. 구미에서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산유화가’는 예족계 백제 유민들이 남겨준 노래였다고 한다. 백제 망국의 슬픈 노래였다가 남녀 사랑의 노래로 윤색된 후 다시 봄 축제의 노래로 변주된 그 연원이 이토록 심원하다. ‘산유화’의 현대적 변용인 김소월의 ‘산유화’라는 대중가요의 뿌리가 바로 우리민족의 근원적인 노래로 정신사의 한 분기점을 이루고 있다.
최미화 기자 cklala@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