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수의 소통여행 기꺼이 새로운 길로 여행하기

[ 대구일보 ] / 기사승인 : 2024-02-04 09:46:55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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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새로운 길로 여행하기

김화수 대구대학교 언어치료학과 교수


실내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 소파쪽에서 진동음이 들려온다. 헐떡대며 받으니 핸드폰에서 들려온 건 아들 목소리다. “엄마, 뭐하고 계세요?” “주전자 타고 있었지” 헉, 내가 발화한 단어인 ‘주전자’에 혼자 웃음이 났다. ‘자전거’처럼 ‘ㅈ’소리가 들어있긴 하지만 세 번이나 나타난 ‘ㅈ’소리와 함께 커다란 주전자를 타고 있는 동화속 아주머니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나를 상상하니 우스웠던 거다. 이 이야기를 들은 동료교수가 말을 보탠다. 자기는 한참 얘기를 하고 있는 과정 중에 지금 논문 지도하고 있는 학생 이름이 기억나질 않아 얼마 전 약속 정할 때 적어 놓았던 일정표 기록에서 그 이름을 찾고 있었다고. 유명 배우의 이름이 생각나질 않아 한 글자만 말한 다음 “그 있잖아, 그 사람!” 하면 남편이 한 글자를 말해주어 겨우 세 음절을 맞춰 이름을 완성한다는 이도 있었다. 단어인출이 안 되거나 설단현상이 나타나는 건 현재 너무 하는 일이 많아 기억의 용량이 과부하 상태이거나, 청춘일 때와는 달리 작업기억과 집행기능의 감퇴 등으로 처리과정이 느려지는 노화현상 때문일 수도 있다.

노화라는 단어를 쓰다보니 2016년 출간된 『할매할배들의 못다한 이야기』라는 이금자 박사의 책이 떠오른다. 시의 제목부터 심상찮다. “며느리사모님”, “못 가”, “니도 늙어봐라”, “내가 와카노” 등 155편이 삽화와 함께 실려있는데 글을 모르거나 잊어버린 어르신들의 말까지도 포함시켜서 시의 형태로 펴낸 것이다. 내가 『치매예방을 위한 인지‧의사소통놀이』 책 두 권과 『현실인식을 위한 치매예방 워크북』 등 세 권을 이금자 박사, 임은실 교수와 함께 학지사 출판으로 세상에 내놓을 때도 선정복지센터에 계신 이 시들의 주인공 100여 분의 언니, 오빠들(?)에게서 도움을 받았음은 당연하다. 이러한 시를 소개하다보니 2024년 새해에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이라는 일본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 포푸리사 편집부’에서 짓고 이지수가 옮긴 포레스트북스의 책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노인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담은 실버센류모음’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공모전 입상작 88수와 그림이 포함돼 있다. ‘센류’는 일본의 정형시 중 하나로 5-7-5의 총 17개 음으로 된 짧은 시라고 한다. 책소개에 나온 “연상이 내 취향인데 이제 없어”라는 야마다 요우라는 92세 어르신의 시에는 지혜와 해학, 약간의 슬픔도 들어있다. 또다른 분의 센류인 “종이랑 펜 찾는 사이에 쓸 말 까먹네”는 앞서 언급한 우리의 주관적 기억장애 얘기와 비슷하다. 아무튼 이 어르신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오래된 경험이나 생각을 시처럼 새롭게 생성해냈다는 점이다.

노화에 따른 언어문제나 외상성 뇌손상 혹은 뇌혈관 사고로 인해 신경언어장애를 가진 실어증 성인들에게 언어의사소통치료 하던 장면을 기억한다. 퍼즐이나 낱말카드, 색연필, 그림물감, 장난감 등을 앞에 놓아드리면 내가 왜 애들이 하는 이런 걸 해야하냐고 말하는 듯 확 밀치거나 화난 표정을 짓는 분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책상에 몸을 기울이며 재미있게 무엇가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분들도 존재했다. 무학이어서 하나도 모르던 한글을 매일의 가슴떨림으로 새로 배우는 어르신들이 계셨는가 하면 질병으로 인해 잃어버린 소리, 잃어버린 글자가 되어버린 언어에 대해서 이제 다시는 안듣고 쓰지 않을 것처럼 소통하지 않으시는 분들도 계셨다, “엄마”라는 말밖에 할 수 없던 전직 교장선생님도 기억해낸다. 얼마간은 말과 의사소통을 포기하고 그 앞에서 혼자 노래부르던 나를 무표정으로 바라만 보셨었다. 후에 멜로디 억양법을 익혀 후렴구를 따라 부르게 되자 가사를 말하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놀라 눈물 글썽이던 그분의 모습이 마음에 깊이 남아있다. 이미 나는 어른이야, 하며 살아오던 시간의 습관을 가진 채 늘 같은 모습으로 고집스럽게 걷지 않고 기꺼이 새로운 길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변화와 성장은 얼마나 눈부신가.

“나는 눈을 뜨며 소리친다. 아 아, 이게 당신이 묻어놓은 보물인가요? 바로 마음의 빛”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다. 그렇지! 나는 매일매일 마음의 빛이라는 이름의 선물을 받고 새로 태어난 아기처럼 걸음마를 배우는 초보자가 될 것을 선택한다. 인생 후반기에는 새 신발을 신고서 새 여행길을 걸어 볼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끝)

최미화 기자 cklala@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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