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살가운 형제, 그리고 우정

[ 대구일보 ] / 기사승인 : 2024-02-06 14:18:01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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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다. 12달 중 가장 잊히기 쉬운 달이다. 어영부영 그렇게 지나가는 달이다. 그러나 앙상한 나무에 귀를 대면 환청처럼 나무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땅 밑에는 온기가 돌아 작은 실뿌리들이 꼼지락거리겠다. 나뭇가지들은 뿌리에서 전해오는 간지러움에 흔들거리고 산새들의 여린 발도 종종거리는 시기이다.

2월은 생명을 준비하는 달이다. 어쩌면 생태계에서는 가장 치열한 달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시끄럽고 혼란하지만, 자연은 섭리대로 운행하고 있다.

2월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K 선배이다.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교육자로서 어린이를 가르쳤으며 명망 있는 시인이었다. 그와 나는 교직과 문학의 공통점이 있었고 D 사범학교 동문이기도 했다. 70년대, 어느 해 2월이었다.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는 일요일, 만나자는 통화를 했더니 이사를 한다고 했다. 필자는 웬 이사? 하며 아파트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을 얼버무리며 그런 일이 있다고 했다. 70년대에는 아파트 붐이 일어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하는 가정이 많았다.

후일 얘기를 들으니, 선배의 친형이 사업에 실패하여 셋방에 살고 있는데, 동생이 집을 지니고 살 수 없다고 하면서 자기 집을 팔아 형의 사업자금을 만들어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급하게 이사를 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연을 알고 가슴이 먹먹했다.

어떤 말로도 선배의 마음을 다독일 수 없었다. 아니 이것은 위로가 아니라 상찬을 받아 마땅한 일이다. 며칠 후, 우리는 자주 가는 술집에서 조촐한 술상을 앞에 놓고 밤늦도록 세상사는 일과, 작품 얘기를 나누었다. 밖에는 2월의 바람이 아직 차가웠지만 필자의 마음은 어느 날보다 훈훈하고 즐거웠다.

수년이 지난 후 선배의 형도 자리를 잡았고, 슬하의 세 남매도 성장하니 집이 필요했다. 마침 마음에 드는 만촌동 언덕바지에 단독주택이 매물로 나왔다. 그런데 선배가 준비한 금액으로는 집값이 부족하였다. 우연히 이 소식은 알게 된 그의 D 사범학교 동기생들은 돈을 모아 집을 사는 데 보태라고 주었다. 물론 자존심이 강한 선배를 배려하여 빌려준 형식이었다. 그의 형제애와 마음 씀씀이는 동기생들에게도 감동을 주어 자발적으로 그를 도운 것이다. 선배는 이 집에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웠으며, 지병으로 작고할 때까지 살았다.

이제 며칠 있으면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이다. 멀리 떨어져 있던 일가, 친척들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정을 나눌 것이다. 요즘의 설날이 과거와는 다르다 해도 조상을 섬기고 형제간의 우애를 다지는 전통은 우리 가슴에 살아있다. 옛말에도 형제간의 우애를 나타내는 형우제공(兄友弟恭)이란 말이 있다. 형은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형을 공경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맞닥뜨리는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일부이지만 재산을 두고, 형제간의 다툼은 감정의 골을 넘어 법적인 소송으로 비화 되기도 한다.

조상들은 형제간의 우애를 특히 강조하였다. ‘길을 가다 황금 덩어리를 주운 형제가 우애에 금이 생길까 저어하여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는 얘기, ‘가을걷이를 한 후 형은 아우를 생각하고, 아우는 형을 생각해서 밤 중에 볏단을 서로 옮겨 놓았다.’는 민담은 조상들의 간곡한 유훈(遺訓)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어린 날 읽은 동화 속의 형제애를 떠올리면 순수 동심으로 돌아가 살가웠던 형과 아우를 생각하게 된다.

설날이 다가오니 K 선배의 형제애와 우정이 새삼 그리워진다. 갑진년 설날에는 온 가족이 모여 덕담을 나누고, 이웃과 벗을 생각하는 명절이 되었으면 한다.

하 청 호(대구문학관장)

김광재 기자 kjk@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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