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손님과 저절로 차려진 잔치

[ 대구일보 ] / 기사승인 : 2024-02-12 10:00:05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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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손님과 저절로 차려진 잔치

김정숙 영남대 명예교수
설날 이른 점심을 먹고 귀향을 서둘렀다. 한강 변에 나갔다가 505번 버스를 타게 됐다. 그런데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버스의 중간에 있는 하차용문 뒤로는 다 외국인이었고, 버스 앞쪽으로 나를 포함하여 네 명만이 한국인이었다. 대화 내용을 보면 외국인이 단체로 탄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명절 쇠러 서울에 갈 때마다 ‘고요한 서울’을 보곤 한다. 서울엔 지방 사람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시민의 절대다수가 고향에 간 덕이다. 한산한 서울을 누비며 이때야말로 유적을 찾거나 산책할 때라며 거리를 누볐었다. 그런데 이제 외국인들이 이 ‘한가로움’을 메우기 시작하나 보다. 의성 쌍호마을에 인터뷰하러 갔을 때, “마을에는 외국인 색시가 낳은 아이 한 명 외에는 아이가 없어”라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한국 사회 내의 외국인, 그들은 일정 기간 머무르는 ‘손님’이거나 아니면 우리 가정사회의 한 구성원이다. 그런데 한국은 우수한 ‘손님접대’ 문화를 지닌 나라이다. 또한 민족끼리는 잘 뭉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외국인끼리 게토를 형성하고 살아야 할 사회는 아니다. 더욱이 명절에 마주친 그들만의 외출은 다른 느낌을 준다.

모친은 내가 외국에서 공부할 때는 눈에 띄는 외국인마다 안쓰럽더니, 내가 돌아오자 그런 애처로운 마음이 사라졌다면서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고 한탄하셨었다. 그때 내 모친이 외국인들을 보던 마음이 전체 외국인들에게 미치면 어떨까?

대학에 입학하는 외국 유학생들은 9월 학기에 오는 경우가 많다. 그해는 학생들이 입학하자마자 긴 추석 연휴가 되었다. 박약회 여성부에서 대구 온 유학생들을 위한 ‘한국전통문화 엿보기’를 펼쳤다.(박약회는 유교 문중 인사들 단체이다.) 개천절 오후, 떡과 차를 차려놓은 다과회가 대구 비행장 뒤편 옻골 ‘백불고택’에서 열렸다. 회원들이 떡, 화전, 다식, 전통차 등 구색을 맞추어 지원해서 상은 저절로 차려졌다. 그들은 한복 차림으로 오면서 집에서 입지 않는 한복들을 가져왔다. 행사가 알려지자, 대구시청, 박약회 고문, 대경중소기업인협회 회장, 도산서원 예절원 원장, 피플투피플 대표 등의 지원이 잇따랐다.

행사 당일, 동요로부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까지 같은 마음으로 노래했다. 그리고 각자 준비해온 음식을 설명하고 나누었다. 이어 전통 혼례복 입는 순서를 마련했다. 학생들은 ‘신랑과 신부’와 사진 찍으며 부러워했다. 이쯤 이르자, 회원들은 자신이 들고 온 한복을 체형에 맞는 학생에게 입혀주었다. 네팔 학생이 대갓댁 도령이 되고, 일본인이 수줍은 새아기가 되었다. 외국인들인데도 한복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몸에 붙어 있었다. 페루에서 온 학생이 서툰 한국말로, “맞는 게 없어요. 나는 뚱보예요.”라고 해서 폭소했다. 남자 한복이 모자랐다.

한복을 입은 유학생과 한국 아줌마들이 고가(古家) 뒷마당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손을 잡고 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말은 필요 없었다. 연세 지긋한 아줌마들과 유학생들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졌다. 못 알아듣는 단어가 없고 원하는 바를 전달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학생들이 한복을 벗으려고 할 때, 아줌마들은 원하면 가지라고 했다. 학생들은 몇 번이나 “정말이냐?”고 되물었다. 꾸미지 않은 감사의 표정이 아줌마들에게 ‘행복’을 선사했다. 한복은 의외로 유행을 타기 때문에 집에 안 입는 한복이 꽤 많을 것이다. 그날 러시아에서 온 학생이 설명한 단군신화는 긴 여운을 남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은 다문화가정이거나, 아니면 한국의 일손을 도우러 온 외국인노동자들이다. 그들은 한국을 국제사회에 소개할 생활 외교관들이다. 이런 명분은 차치하고라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집 떠나온 나그네’이다. 설 명절을 쇠면서 전 한 접시, 떡국 한 그릇 가지고 옆집 문을 두드려 보면 어떨까?

김정숙 영남대 명예교수

최미화 기자 cklala@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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