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9월, 모 경매전에 한 점의 흥미로운 문서 두루마리가 출품되어 주목받았다. 바로 1797년 6월에 작성된 ‘「춘하등포폄등제(春夏等褒貶等題)」’로, 전라도 49개 고을 수령들의 근무 성적을 기록한 ‘성적표’였다. 얼룩과 구김, 변색의 흔적이 뚜렷하지만, 220여 년의 세월을 견뎌온 이 문서는 조선 후기 행정 문화의 이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 포폄(褒貶)이란 무엇인가?
‘포폄(褒貶)’은 조선 시대 관리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포상과 처벌에 반영하던 제도였다.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 실시되었다. 중앙 관료인 ‘경관(京官, 수도 한양의 관리)’은 소속 관청의 고위 관리가, 지방 관료인 ‘외관(外官, 지방 수령)’은 관찰사(觀察使)와 병마절도사 등이 중심이 되어 평가를 주관하였다. 이는 단순한 성적 기록을 넘어, 지방과 중앙의 행정 현실과 정치적 고려가 맞물린 제도적 장치였다.
◆ 위백규, 그는 누구인가?
위백규(魏伯珪, 1727~1798)는 조선 후기의 저명한 실학자이자 행정가이다. 그의 자(字)는 자화(子華), 호(號)는 존재(存齋)·계항(桂巷)으로,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잇는 학자이자 성리학적 학문을 평생 탐구한 인물이다.
1795년(정조 19) 선공감 부봉사로 재직 중에 올린 장문의 상소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그는 사회의 여섯 가지 폐단을 지적하고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특히 재야 학자의 등용과 향촌 자치의 확대를 주장했는데, 정조는 이를 높이 평가하여 곧바로 그를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상소가 성균관의 폐단을 직격하자, 성균관 유생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위백규는 이에 따른 정치적 부담과 더불어 고령으로 인한 지병의 악화를 이유로 1796년(정조 20) 옥과현감직을 사직하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1797년 2월, 그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먹고 마시고 기거하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여러 차례 사직장을 올렸으나 감사(監司≒관찰사)는 허락하지 않았다. 정조는 “중앙에 자리가 나면 기용하라!”라는 배려의 뜻을 전했으나, 그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다.

◆ 지방의 냉정한 평가: 포폄단자의 기록
1797년 윤6월에 작성된 전라도 포폄단자에 따르면, 당시 옥과현감이던 존재 위백규의 성적은 ‘최하(最下)’로 매겨졌다. 평가 사유는 “오랜 병으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도적을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관아를 소란스럽게 했다.”라는 것이었다. 학문적 명성과 중앙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지방 차원에서는 병환으로 인한 행정 공백을 문제 삼아 혹독한 평가를 한 것이다. 이는 전라도 관찰사가 주도한 평가로, 상급 감독기관의 행정적 시선이 반영된 결과였다.
◆ 중앙의 긍정적 평가 : ‘승정원일기’의 기록
그러나 정조는 포폄 결과를 보고 크게 분노했다. 『승정원일기』(정조 21년 윤6월 15일)와 『존재집』 제24권 연보에 따르면, 정조는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위백규의 치적은 병과 상관없이 높이 평가할 일이다. 또한 도적을 안정시킨 정책은 상을 줄 일이지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이번에 그를 ‘하고(下考, 최하)’로 평가한 것은 전적으로 무른 땅에 말뚝 박듯 그의 세력이 약하다 하여 성적을 낮춘 것이다. 어찌 이렇게 흠만 찾는단 말인가! 감사라는 자가 지극히 놀랍다.”
정조는 즉시 감사에 대한 엄한 추고(推考, 문책)를 명령하고, 위백규의 성적을 무효화하였다. 나아가 “경직(京職, 한양의 벼슬)에 자리가 나면 복직시켜 등용하라!”라고 지시했다.
정조에게 도적 문제는 왕조 기강과 민생 안정에 직결된 중대한 사안이었다. 따라서 절차적 문제보다 ‘도적 소탕’이라는 실질적 성과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 정조의 간곡한 배려, 그러나…
정조의 배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7월 16일 위백규를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로 임명했지만, 그는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10월, 이조에서 “기한이 지났는데도 숙배하지 않았다.”라고 아뢰자, 정조는 다시 간곡한 전교를 내렸다.
“위백규의 학문과 식견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집안의 행실도 극히 온전하게 잘 갖추어져 있다. 조정에서 그에게 진정을 다한 것이 어찌 사사로운 마음에서였겠는가! 결코 이대로 벼슬을 그만두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조는 감사에게 본도의 묘(조경묘 肇慶廟)와 전(경기전 慶基殿)의 영(令) 자리를 위백규와 바꾸도록 명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병세는 더 이상 길을 나설 수 없을 정도였고, 12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교체되었다.
◆ 평가의 차이는 왜 발생했는가?
이러한 평가의 차이는 단순히 ‘지방 대 중앙’의 구도로 환원하기 어렵다. 오히려 관찰사의 행정적 판단과 국왕 정조의 통치 철학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정조가 관찰사를 추고하고 성적을 무효화한 것은 이러한 갈등의 극명한 표현이었다.
관찰사가 ‘최하’ 등급이라는 이례적인 평가를 한 데에는 행정적 판단 외에 개인적 갈등이나 정치적 고려가 작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문헌상 그 직접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어느 한쪽 기록만으로는 진실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다. 양측의 기록을 교차 검토할 때 비로소 위백규와 당대의 행정 현실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성적 분포와 평가의 의미
포폄단자에 기록된 49명의 성적 분포는 상(上) 38명, 중(中) 6명, 하(下) 2명이었으며, 일부 신임 수령의 평가는 보류되었다. 대부분 후한 평가가 주를 이룬 상황에서 위백규는 ‘최하’ 등급을 받았다. 이는 포폄 제도가 단순한 성적 기록 절차를 넘어, 상급 행정 기관과 최고 통치자의 시각차, 그리고 행정 현실과 정치적 판단이 복합적으로 얽힌 소통의 장이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 220년 전 성적표가 던지는 물음
이 두루마리는 단순한 고문서가 아니다. 오늘날의 공직자 평가와 인사 제도 역시 유사한 고민을 안고 있다. 정량적 성과가 ‘드러나지 않는 헌신’을 담아내지 못하거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될 때 평가의 공정성은 쉽게 흔들린다.
1797년 포폄단자와 『승정원일기』의 불일치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평가는 과연 누구의 시각에서, 어떤 기준으로 내려져야 하는가?”
이 질문은 1797년과 2025년을 가로질러 여전히 유효하다. 평가란 언제나 기록자의 위치와 권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220년 전의 성적표는 오늘의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