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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 풍경] “남세스럽게 이게 뭔 일이고”

[이투데이 홍유미 전북대병원 산부인과 의사 기자]


쭈뼛쭈뼛 80대 할머니 한 분이 진료실로 들어오셨다. 반쯤 굽은 허리로 외투부터 속옷까지 긴 과정의 탈의를 마치고 어렵게 쇄석위 자세로 누운 할머니는 “다 늙어서 이게 무슨 추태래. 얼른 죽어야지. 아유 남세스러워라.” 말씀이 많아지는 걸 보니 많이 긴장되시는 모양이었다. 회음부 주위에는 할머니가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신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혈액이 묻어 있었고, 진찰 결과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질경을 삽입하자마자 흉측한 모습을 한 암덩어리가 자궁경부는 물론 질 입구까지 갉아먹고 있었고 활화산 같은 출혈이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떤 말을 어디까지 드려야 할지…. 하필이면 이럴 때, 아니 늘, 환자는 보호자도 없이 혼자이다. 남편은 사별한 지 오래이고, 자식들은 서울에 살아서, 바쁠 것 같아서. 아픈 이유는 모두 다른데 하나같이 사연은 똑같다.

우리 삶에 짙게 밴 유교적 사고나 풍습 때문인지, 아니면 시골에는 산부인과 의사가 턱없이 부족해서인지, 아직도 우리 병원에 오는 상당수 노년의 환자들은 초음파 등 산부인과 정밀진료는 고사하고 무료 암검진인 자궁경부암 검진조차 수년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산부인과 진료를 받는 것 자체를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이 여기며 피하거나, 마치 와서는 안 될 금기의 영역에 들어온 것처럼 부끄러워한다. 이러한 이유로 증상이 일상생활을 망칠 만큼 아주 심각해져야만 병원에 오기 때문에 응급실을 방문했을 때에는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암이 진행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암이 진단되어도 답답한 것은 매한가지이다. 병의 원인이나 경과 등을 귀도 잘 들리지 않는 할머니들께 이해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추가 검사를 위해 젊은 보호자와 함께 다시 내원하라고 몇 번이고 설득해도 도무지 먹히지를 않는다. 오늘 만난 할머니도 다음 예약 때 오지 않을 것 같아 응급처치만 간신히 끝내고 보내려는데, 굽은 몸으로 주섬주섬 옷을 입는 장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남편, 자식 뒷바라지로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느라 정작 본인 몸 한번 돌볼 여력이 없어 이 지경이 되고도 뭐가 그리 미안한 것투성이인 것인지….

할머니의 쓸쓸한 뒷모습이 우리 할머니의 모습과 꼭 닮은 것 같아 당장 수화기를 들었다. “할머니, 다음번에 병원에 가실 때는 저랑 같이 가요.”

홍유미 전북대병원 산부인과 의사

홍유미 전북대병원 산부인과 의사 기자 opinion@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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