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 말 왕과 집권 세력은
국가와 국민을 버리고
자신들의 안위만을 지켰습니다.
결국, 대한제국은 경술국치 조약 한 장으로
일본에 넘어가게 됩니다.
홍주의병은 이러한 왕과 집권층이
나라와 국민을 지키지 못한 때
백성이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
스스로 일어나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전국 최대 규모의 항일 의병투쟁이었습니다.
1896년 제1차 홍주의병 사건은
청일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홍성의 김복한, 이설, 이병찬 선생 등이
의병을 일으켰고 청양의 선비들까지 가세하여
홍주성을 점령했습니다.
1906년 제2차 홍주의병 사건은
1905, 11월 을사늑약으로 망국이 눈앞에 이르자
홍주의 안병찬, 박창로, 이세영 선생 등이
1906, 3월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부여의 지치에서 의병을 결집하여
남포전투에서 승리하고 홍주성을 재점령하게 됩니다.
이에, 깜짝 놀란 조선통감은
공주의 경찰대, 수원의 헌병부대를 급파하여
홍주성을 공격했고 홍주성의 의병이
공격을 막아내고 성을 굳게 지키자
다시 조선주차군사령관에게 명하여
용산의 보병, 전주수비대 등 일본 정규군을 급파하여
경찰과 헌병, 진위대 합동으로 홍주성을 공격하고
마침내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900여 명의 의병들이 모두 산화하게 됩니다.
그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곳 홍주성입니다.
홍성은 특히, 충남 서부지역의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지켜낸
전국 최대 규모의 항일 의병의 중심지였습니다.
의병의 희생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중심은
단연, 이곳 홍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충남의 선비들과 민중의 끈질긴
항일 독립정신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홍성은 전국에서 가장 치열했던
의병 항쟁의 중심지이고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곳이기도 하며
부여, 청양, 보령, 결성, 예산, 당진, 서산, 서천 등
내포 지역 총력 투쟁의 중심지였습니다.
이연우 초려문화재단 이사장
청명한 하늘과 푸른 나무 아래서 한국의 대표적 지성문화인 유교문화를 계승하고, 맥과 정신을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자연 가까이 머물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 창조적인 삶을 만들어간다.